최종편집 : 2019.08.23 16:21 |
[구술생애사] 고추 팔아 카메라를 산 농사꾼, 임동면 마령리 사는 문병태
2019/07/26 15:52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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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공동기획연재] 2019 안동·예천 근대기행(1)
2019년 안동예천 근대기행은 생생한 르포취재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다룬 <구술생애사>와 안동과 예천 두 지역의 역사와 문화, 생활사의 근간이 되는 ‘마을’을 테마로 한 <우리 마을 이야기>를 그려낼 예정입니다. 그 첫 번째로 임동면 마령리에 사는 농사꾼 문병태 씨의 삶의 발자취를 따라가 봅니다. -편집자

사람들은 모두 무언가 자신만의 흔적을 세상에 남긴다. 각자가 가진 그릇만큼, 살아낸 이력만큼의 흔적이 세상에 남는다. 저마다의 삶은 비슷한 듯 보여도 다르고, 각자가 살아내는 삶의 결이 다르듯 남겨지는 발자취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세상에는 자기가 걸어온 삶의 결을 따라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사람들이 있다. 호모 아키비스트, 호모 스크립투스……. 흔적을 기록으로 남기는 사람들 말이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흔적을 기록하려는 인간의 의지가 그 말 속에 담겨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임동면 마령리에 사는 문병태는 사진으로 흔적을 남기는 사람이다. 자신이 찍은 사진으로 살아온 발자취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01.jpg▲ 임동면 마령2리 사는 문병태
 
문병태는 1932년생으로 올해 우리 나이로 88세, 집 나이로는 89세다. 임동면 마령 양지마에 살다가 임하댐 건설로 예전 마을이 물에 잠긴 후 마령리 언덕 위에 집을 옮겨짓고 살고 있다. 장가를 두 번 갔고 올해 81세 되는 부인 김순조와 딸 둘, 아들 여섯 팔남매를 두었다.

문병태 어른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임하면 신덕에 사는 문원갑 어른 때문이었다. 책이며 기록에 관심이 많은 원갑 어른과 마동에 있는 남평문씨 재사 모선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모선재 앞집에 사는 문병태 어른이 찍었다는 사진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집 전화번호 하나만 들고 우선 길을 나섰다. 병태 어른을 찾아가는 길에 들른 중평을 지나 마령1리 마을에서 만난 분들은 “병태 그 사람 집에 오래된 사진이 더러 있을 거라”고들 했고, 마령2리 들머리 이식골 동네 정자에 앉아 쉬고 있던 어르신은 “저 모퉁이 돌면 바로 그 사람 집이지마는 문병태 그 사람은 지금 저기서 농약 치고 있어. 저짜 삼거리서 차를 돌려서 밭으로 가 보든지”하며 도로 건너 아래 보이는 밭을 손으로 짚어주셨다. 그래서 더운 여름, 태양이 내리쬐는 오후 1시가 넘은 한낮의 시간 고추밭에서 문병태 어른을 처음 만났다.

고추밭으로 찾아가 대뜸 살아오신 이야기를 듣고 싶다 하자니 염치가 없는데 병태 어른이 나는 그런 기록할 만한 인물이 못된다고 손사래를 치신다. 그러다가 혹시 옛날 흑백사진들 찍어놓으신 게 있다고 들었는데 구경 좀 할 수 있느냐고 하자 그제야 얼굴이 펴진다.

“사진이야 보여줄 수 있지. 그러만 좀 있다 집으로 오시소. 약 다 치려면 한 삼십분쯤 더 걸릴 긴데 나중에 집으로 오시소.” 한다.


02.jpg▲ 양지마쪽에서 바라본 음지마 문병태 씨네 방앗간.
가운데 보이는 건물이 방앗간이고 오른쪽이 살림집, 왼쪽에 이발관이 있었다.
 
03.jpg▲ 음지마 집 마당 문병태 씨네 가족
 
그렇게 삼십분 뒤 찾아간 집에서 병태 어른이 찍은 오래된 흑백사진들을 보게 되었고 사진에 얽힌 이야기는 자연스레 병태 어른이 살아온 인생 이야기로 이어졌다.

“나는 사진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서 그냥 내 맘 내키는 대로 찍고 그랬어요. 나이 들고 요즘 와서 내 딴에는 정리를 한다고 해 봤는데 별로 기록될 만한 게 없어요. 이 사진은 이 사람도 모르게 찍은 거거든요. 나는 사람들이 알게 잘 안 찍었어요. 찍히는 사람도 모르게 찍은 게 많아요. 그런데 작품이 될 만한 의미 있는 사진은 별로 없어요.” 라는 말과 함께 병태 어른 손이 사진을 붙여 놓은 낡은 노트를 한 장씩 넘겼다. 그렇게 병태 어른의 사진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내가 처음 카메라를 산 게 열다섯 살 때였어요. 사무카라고 일본에서 나올 때 사가지고 왔어요. 흑백필름 사진 요거는 그 사무카로 찍은 거야. 우리 아부지가 일본에서 살았기 때문에 나는 일본에서 태어나 열다섯까지 살다 해방을 앞두고 1945년 그해 3월 10일 날 한국에 나왔어요. 일본 교토시 후시미쿠에서 살았어요. 아부지 고향인 안동으로 온 거지요.”

그가 1945년 3월 10일을 지금도 어제 일처럼 똑똑히 기억하는 것은 한국으로 온 그해 그의 생이 극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04.jpg▲ 음지마 골마 집앞에서 막내 아들을 안고 있는 문병태 씨와 두 딸. 왼쪽에서 두 번째가 큰딸 경자 씨.
 
05.jpg▲ 음지마 옛집 마당. 오른쪽에 모친이 삼던 삼줄기가 걸려 있다
 
해방과 6.25를 겪으며 어른이 되다

병태 어른은 열다섯 살 때 마령리로 왔다. 해방되기 다섯 달 전이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 혼인을 했다.
“일본에서 나온 그해 열다섯에 결혼 했어요. 그런데 열아홉에 첫 애 낳고 얼마 뒤에 집 사람이 안동에서 연탄가스 채서 죽었어요.”

일찍 장가를 들어 가장이 된 병태 어른은 돈도 벌어야 했고 한국말도 배워야 했다. 늦깎이로 학교를 가려고 해도 우리말을 모르니 학교를 갈 수가 없었다.

“한국 나왔는데 동생하고 내하고 둘 다 한국말을 하나도 몰랐어요. 엄마, 아부지, 이 정도만 알지 15년을 일본말만 배우고 일본에서 소학교 졸업하고 고등과에 진학해 다니다가 왔는데 한국 와서 졸지에 바보가 돼버린 거지요. 아버지는 그전에 미리 나와서 안동서 사업하다가 망하는 바람에 식구들이 고생을 많이 했어요.”

알아야 면장을 해먹는다는 말처럼 뭐라도 해서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우선 까막눈을 면해야 했다. 다행히 해방이 되고 이웃동네 마째(마령리 고개 너머에 있던 동네 맛재)에 있던 명작관에서 그동안 잊어버렸던 한국말을 가르쳐주는 강습반이 생겼다.

“명작관에서 가갸거겨 부터 배웠어요. 명작관은 원래 일제 강점기에 목화를 재배해서 면포를 생산하려고 장려하기 위해서 지은 집이었어요. 거기서 해방 후에 우리말과 글을 가르친 거지요. 마재 살던 류씨 어른이 한글을 가르쳤어요.”

그때 15일 동안 배워서 독학을 하다시피 한글을 익힌 탓에 아직도 이응, 니은 받침이 잘 안 된다는 병태 어른은 기역, 치읓 같은 받침이 헷갈린다고 했다. 다행히 일본말이 한자로 되어 있는 게 많아 한문을 좀 알았던 까닭에 밤으로 동네 풍호 어른께 천자문을 배우러 다녔다.

“그 어른이 하늘 천~ 하면 내가 따라 하는 데 한국말이 서툴다 보니 하날 천~ 그러면 ‘이놈! 하늘 천이지 하날 천이 뭐로?’ 하시며 혼을 내고 그랬어요. 얼마 못 배우고 야단만 맞다 쫒겨 났어요. 그러다가 군대 갔다 와서 밤으로 이웃 동네 금사홍 씨 증조부 되는 분한테 다니며 한문을 다시 배웠어요.”

제대로 된 공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게 살아오는 데 밑천이 되었다.

06.jpg▲ 지게에 나무를 해서 오는 육촌형님
 
그의 나이 열아홉에 첫 아이를 낳았고 얼마 안 돼 전쟁이 코앞으로 닥쳤다. 마을에 빨갱이들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장성한 남자들은 마을 뒷산으로 피했고 병태 어른도 집 뒤 산꼭대기에 숨어 있었다. 그러다가 전쟁이 일어났고 한국전쟁 기간에 그는 군대에 있었다.

“강원도 군부대서 복무했는데 제대해서 나중에 그때 친했던 동기를 찾아서 만났어요. 내하고 동갑이고 6.25때 화염방사기를 담당했는데 불이 나서 얼굴에 화상을 입었어. 내가 찾아서 만나고 서로 내왕을 했지. 내랑 동갑인데 지금은 죽고 없지.”

그때 생사를 같이 했던 오랜 친구는 먼저 가고 그에게는 국가유공자라는 이름이 남았다.

“우리 누이가 일본에 시집가서 열일곱에 아들 낳고 복막염으로 죽었어. 그 누이 아들이 찾아와 모친 사진을 보고 싶다고 하는 걸 없어서 못 보여준 것이 미안하지. 원래는 누이 사진이 나한테 있었는데 첫 마누라 죽고 나서 일본서부터 그때까지 찍은 사진을 다 태워 없애버려서 예전 사진이 하나도 안 남았어. 두고두고 미안했지.”

그 죽은 누이의 유골을 귀국할 때 가지고 와서 남의 산에 몰래 묻었다. 흔적이 희미해져 무덤조차 찾아주지 못했다고 했다.

07.jpg▲ 용상동 집에 같이 살던 다섯집 엄마들과 아이들
 
용상동에 집을 짓고 다섯 식구가 살던 시절

병태 어른은 손재주도 좋았고 그 시절 카메라로 사진을 찍은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감각도 있었다. 젊은 시절, 그는 타고난 감각과 손재주를 살려 목수 일을 배웠다. 지금의 부인인 순조 할매와 재혼을 하고 목수 일로 돈을 벌어 식구들을 먹여 살렸다. 대목이 되어 전국으로 집을 지으러 다녔다.

“저 아래 남쪽에서부터 멀리 경기도 안양까지 집 짓느라 전국 안 댕기는 데 없이 다 돌아댕기며 객지생활 많이 했어요. 그런데 마지막에는 결국 뿌리 내린 고향으로 왔지요. 안동 와서 용상동에 터를 사서 집을 지었어요. 집을 짓고 남는 방과 문간방을 달아내어 세를 줬는데 네 집이 세를 들어서 다섯 식구가 한 집에 살았어요.”

그 집에서 10년을 살았다. 다들 고만고만한 살림이었지만 같이 아이들을 키우고 먹을 게 있으면 나눠 먹으며 살던 시절이었다. 용상동 집에 살던 다섯 집 식구들과 아이들 키우며 살던 모습이 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우리 집에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이랑 이웃인데 여기 애들이 바글바글 하잖아. 우리 첫째 경자가 얼라 때 찍은 사진이래.”

파출소장집 아들딸, 목수집 아이들, 장사하는 집 아이도 그 집 마당 안에서 함께 자랐다.

08.jpg▲ 용상동 집에서 아이들의 여름 물놀이
 
09.jpg▲ 용상동 살 때 물놀이 간 여름날의 문병태 김순조 부부
 
당차고 야무졌던 순조 할머니

순조 할머니는 상처한 병태 할아버지와 결혼을 하고 팔남매를 낳았다.

“나는 칠남매 중 첫째래. 여동생 하나 남동생 다섯. 남동생들 다 업어 키웠지. 시집와서 딸 넷, 아들 넷을 여기 경자 놔두고 칠남매 다 공부시켜 시집장가 보냈어. 저 양반은 애들 시집장가 보낼 때 본인이 직접 며느릿감, 사윗감 다 가서 보고 결혼시켰어. 내하고 둘이 가서 멀리서 얼굴 보고 오기도 하고 당신이 미리 선을 보고 결혼시켰어. 다들 탈 없이 잘 살아주니 고맙지 뭐.”

010.jpg▲ 새댁 김순조(오른쪽에서 세 번째)와 동네 부인 다섯이 신랑들 몰래 포항 바닷가 놀러간 사진.
동해안 철책을 지키던 군인이 같이 기념촬영을 해주었다.

젊어서는 신랑 모르게 동네 새댁들을 이끌고 동해바다로 놀러도 갔다. 새댁들이 신랑 없이 멀리 놀러가는 건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이거가 우리 할마이가 나 모르게 놀러간 사진이래. 내한테 이야기 안 하고 포항 놀러간 거래요. 그때만 해도 옛날 아닙니까? 여자들끼리 간다 그러만 안 보내줬지요.”

“마카 신랑들한테 말 안하고 우리끼리 놀러간 거래. 포항 가서 회도 먹고 바닷가도 가고 경주 가서 자고. 안 보내주니까 우리끼리 그래 갔지. 내가 가자고 그랬거든. 내 따라 다 나섰지. 지금은 하마 팔십 하나지만 그때는 젊었고 놀러는 가고 싶고 한데 신랑이 안보내주니까 말 안하고 갔지.”

몰래 놀러갔다 온 부인 사진도 고이 간직했다 정리해 놓은 병태 어른은 순조 할머니도 인정하듯이 사진이 유일한 취미로 술, 담배도 안 하고 누구처럼 여자 걱정도 안 시켰다. 오로지 시간만 나면 사진기 들고 사방팔방 쫓아다녀서 그렇지 딴 걱정은 시킨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고추 판 돈에서 백오십만원이라는 거금도 선뜻 내어준 것이었다. 식구들 건사 잘 하고 다른 속 안 썩이는 남편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011.jpg▲ 챗거리장터에 간 부인 김순조.
새옷을 입고 분과 액서세리를 파는 가게 앞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는 모습에 셔터를 눌렀다.
 
인생의 숨구멍이 되어준 사진 취미

팔남매 키우느라 일도 많이 했고 고생도 했지만 그래도 참 부지런히도 살아낸 세월이었다. 고된 가운데서도 팔남매 데리고 울고 웃으며 그 큰 고개를 무사히 넘어왔다. 인생의 고갯길 그 고된 일상 속에서 한줄기 숨 쉴 구멍이 그에게는 카메라와 사진이었다.

“찍을려고 생각하고 찍는 게 아니고 보고 괜찮겠다 싶으면 그냥 찍었어요. 순간적으로 이거 물건 되겠다 싶으만 찍고 그랬어요. 이유가 없어요, 그저 내 하고 싶어서 찍은 거뿐이래요.”

찍힌 사진을 보면 그 시절 가졌던, 그 사진을 찍었던 카메라를 알 수 있다.

그가 열다섯에 가졌던 첫 카메라 사무카, 두 번째 카메라 미놀타, 그리고 삼성에서 나온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이 각기 그 시간들을 이야기해 준다. 지금 가지고 있는 삼성 콤팩트 디지털카메라는 생일에 자식들이 선물해준 것이다. 다섯 번째 카메라이다. 그 세월에 많은 숫자가 아니다. 그러나 팔십팔 년 살아온 세월 동안 방앗간에, 목수일에, 마령들에서 농사짓는 농부로 살면서 카메라가 그 수명을 다할 때쯤에야 또 다른 카메라를 사서 고된 농사 일 틈틈이 사진을 찍은 병태 어른 입장에서는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다.


고추 팔아 카메라를 사다

사는 게 넉넉지 않았던 시절이라 취미로 사진을 찍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저 할마이가 내가 자꾸 뭐 이래 찍고 돈도 많이 들고 하니까, 고마 일부러 카메라를 널짜 부랬어요. 내가 그때도 그랬고 아직까지 사진 찍어주고 남한테 돈 일 원 한 푼 받은 역사가 없어요. 어디 갔다 오니까 카메라 케이스가 깨져 있어요. 근데 이거 왜 이렇노? 하니까 실수로 널짜 부랬다고 그래요. 할마이가 일부러 그런 거 알았지만 아무소리 안 했지요.”

012.jpg▲ 담배 조리하는 음지마 동네남자들. 그때만 해도 담배조리 일은 주로 마을 남자들이 했다.
 
013.jpg▲ 목수 일을 배워 대목이 된 문병태
 
돈도 돈이고 사진 찍는다고 바깥으로 도는 남편이 원망스러워 그런 것인 줄 알아 한참을 군소리 없이 지냈다. 그렇다고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 뒤로 한 2년 카메라 없이 살았지요. 그 뒤로 어디 가면 사진관 가서 돈 주고 카메라 빌려서 가고 그랬지요. 그러다가 한 2년 후에 그래 고추가 잘됐어. 그때 돈으로 백만 원을 주잖아요.”

“백오십만 원 줬잖아요.”

“백만 원 주고 미놀타 카메라를 사고, 망원렌즈를 50만 원 주고 또 샀어요. 150만 원 들여 카메라를 장만한 거지요. 그걸로 찍다가 내 나이가 오십 넘어 육십 다 되어 갈 때 디지털 카메라가 나와서 지금 디지털 카메라만 세 개 째니더. 그거는 카메라가 좀 무거웠지. 미놀타로 필름 사진을 찍다가 삼성에서 디카가 나온 뒤로 디카만 세 개째 바꿨어.”

농사꾼이다 보니 아무래도 흙먼지며 트럭 뒷자리며 환경이 녹록지 않은 탓이었다.

그걸로 내 딴에는 찍어두면 좋겠다 싶은 거, 그의 눈에, 마음에 꽂히는 게 있으면 사진을 찍었다. 이제는 스마트폰이 나와서 휴대폰으로도 찍는다. 지금도 새로 나온 카메라를 보면 욕심이 나지만 참는다는 병태 어른이다.

“다 늙어서 갈 날 얼마 안 남았는데 이제 새로 사서 뭐하니껴? 지금 있는 사진기로도 온갖 사진 다 찍는데요.”

하면서 눈으로 동의를 구하며 맞장구를 치는 것이 병태 어른이 다짐을 주어도 순조 할머니는 안심이 안 되는 모양이다. 그래도 사진 좋아하는 영감이 식구들하고 어디 갔다 온 거며 젊을 적 할매 모습은 물론이고 친정붙이들하고 찍어준 사진이 많아 한 번씩 모이면 옛날이야기를 하며 웃음꽃을 피우곤 한다고 했다.

014.jpg▲ 담배파종기를 들고 있는 총대(작목반장)와 담배 재배 지도사를 촬영한 사진
 
병태 어른이 사진을 찍는 기준은 물건 되겠다 싶은 결정적 찰나의 순간을 포착해내는 것이다. “어디 지나가다가도 물건 되겠다 싶으면 순간적으로 찍는 거예요. 진짜 찍고 싶은 거는 비행기가 추락하듯이 뚝 떨어지는 거, 교통사고 같은 찰나의 순간 그런 거지. 그런데 그런 거는 잘 없어. 그래도 순간적으로 내 눈에 들어오는 거, 찰나의 순간, 내가 찍고 싶은 거, 그런 거를 주로 찍었어. 찍히는 사람들 모르게 자연스러운 순간을 많이 찍었어요.”

015.jpg▲ 마당에 곡식을 고르는 할머니와 어린 손자를 멀리서 찍었다
 
016.jpg▲ 그의 사진에는 잔칫날 아지매들의 번다한 수다까지 담겨져 있다
 
자연스럽게 생활하는 모습을 찍으려고 하다 보니 얼굴이 잘 안 나오는 사진도 많다. 그 대신 병태 어른이 찍은 사진 속 인물들은 자연스럽게 웃고 있는 모습이 많다. 잔칫날 부침개 부치며 웃는 아지매들의 번다한 수다가 있고, 막걸리 한 잔 하며 나누는 새참의 여유가 있고 소낙비 오는 날 부산하게 빨래를 걷는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다. 다섯 식구가 모여 살던 용상동 시절의 사진은 우리들을 순식간에 그 시절의 어디쯤으로 데려간다.


수몰 전의 양지마와 새터, 골마를 찍다

017.jpg▲ 임하댐 건설로 물에 잠기기 전 마령2동 음지마
 
018.jpg▲ 임하댐 건설로 물에 잠기기 전 마령2동 양지마 덕골
 
019.jpg▲ 임하댐 건설로 물에 잠기기 전 마령2동 이식골. 이식골도 건너 언덕 위로 옮겨 앉았다.
 
임하댐이 만들어지면서 저지대에 있던 임동면 마령면의 옛 마을들이 물에 다 잠겼다. 물들기 전에는 3개 부락이 살았던 마령2동이었다. 양지마, 새터, 골마. 지금 집에서 강 건너 보이는 곳이 옛 동네다. 다리가 만들어지고 길이 새로 닦이고 마을의 집들이 한 집 두 집 비어갈 때 병태 어른도 옛집과 담배창고를 허물고 그 흙을 가지고 언덕 위 새 터에 보상받은 돈으로 집을 지었다.

“이게 삼십여 년 전이지 싶니더. 임하댐 되면서 집 새로 옮겨지었으니까. 터 닦고 내 손으로 일일이 다 지었지요.”

집 짓는 과정도 사진으로 남겨두었다. 집을 짓기 전 남평 문씨 재사 모선재부터 옮겨지었다.

“원래 종택은 남후면으로 이건했고요. 그래도 양반이라고 구색을 갖추고 조상님께 제사 지낸다고 저 아래 있던 모선재 재사 건물을 내가 이 집 뒤 언덕에 옮겨 새로 지은 거지요. 서까래며 건물이 다 내려앉을 정도로 오래되어서 새로 지었어요. 지금도 시월에 문중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지요.”

020.jpg▲ 수몰을 앞두고 손수 집을 옮겨짓고 있는 모습
 
021.jpg▲ 새로 놓인 다리 아래로 물이 차오르고 마을 집들이 잠기는 것을 지켜보며 사진을 찍었다
 
임동 다리가 놓이고 물에 집들이 잠기는 모습도 사진으로 찍어 두었다.

“이때만 해도 벌써 사진기 가진 사람들이 많아서 내 말고도 당시 사진들이 많을 거래요. 마령 동네 물들기 전 시절의 사진들이 상자 속에 남아 있을 거예요.”

많이 없앴지만 그래도 따로 갈무리해 둔 것 중 유독 기억에 남는 사진이 있다.

022.jpg▲ 마을의 장례사진. 대소사를 가리지 않고 열심히 기록했다
 

사진 한 장이 만들어낸 모녀상봉

“작년에 이 사진 때문에 좋은 일이 있었어요. 가까운 사람 중에 개가를 한 사람이 있어요. 딸이 하나 있었는데 대구로 가서 살다가 어릴 때 소식이 끊겼는데 다 커서 여기로 찾아왔어요. 그때 ‘너 어매 사진이 나한테 있다’ 그러니까 ‘자식 버리고 간 엄마 필요 없다’고 안 봐요. 재작년 설에 내외가 인사치레를 왔길래 내가 컴퓨터 안에 저장해 놓은 사진을 꺼내놓고 사위하고 앉혀 놓고, ‘이리 와 봐, 이제는 엄마 사진 한 번 봐도 안 되나?’ 하며 보여주니까 그래도 외면하고 안 봐요. 그런데 신랑 되는 이가 폰을 꺼내더니 그 사진을 담아 가더라고요. 그 딸이 벌써 오십이 가까워 오는 나이래요. 그런데 얼마 전에 엄마를 만났다고 연락이 왔어요. 그 엄마 사진이 6장이

023.jpg▲ 모녀 상봉의 계기가 된 사진. 어머니의 시집올 때 사진이 딸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을까.
 
었는데 그 사진들을 담아가더니 찾아간 모양이래요. 만났다고 하더라고. 이게 내가 그래도 카메라 들고 댕겼던 인생에서 보람되는 가장 남는 한 가지 아닌가 싶어.”

요즘 병태 어른이 틈나면 하는 일이 사진을 정리하는 것이라고 한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나이가 들면서 흑백사진들은 점차 상하고 흐릿해 지는데다 본인이 죽으면 아는 사람도 없이 쓸모없어질 거다. 큰 자료가 되지는 못하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고 내용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혼자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옛날 가족사진을 한참 전에 CD로 구워놓은 것도 있지만 컴퓨터 본체 안에 꽂힌 채 들어있는데 고장이 나서 먹통이 되어 뺄 수가 없다고 한다. 다행히 없애지 않고 남아있는 흑백 사진들을 공책에 붙여서 정리를 해놓은 게 있었다. 오래되어 사진 상태가 좋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병태 어른이 정리해 놓은 사진 속에는 마을 사람들과 마을이 살아온 이야기가 있었다.

024.jpg▲ 문병태의 마을 기록_ 마을 잔칫날
 
025.jpg▲ 문병태의 마을기록_솥뚜껑에 전 굽는 아낙
 
026.jpg▲ 문병태의 마을기록_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무렵 마을 공동작업을 하는 마령리 사람들
 
 
취미로 남긴 농사꾼의 생활기록

인터뷰를 마치며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남을 찍어주는 건 좋아해도 본인이 사진 찍히는 건 어찌나 어색해 하는 지 한사코 사양을 하시는 걸 간신히 허락을 얻어 찍었다. 한낮에 농약을 치고 들어와 제대로 씻지도 않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부끄러워 하셔서 흑백 프레임으로 찍은 한 장이다.

027.jpg▲ 임동 챗거리 장터에서 젊은 시절의 문병태

돌아 나오는 길, 그저 사진 찍는 게 좋아서 찍었다는 병태 어른의 말이 마음에 남았다. “옛날에는 임동면에서 그래도 부자소리 들어야 사진이라도 남아 있고 하지 서민들은 사진 찍어놓고 그럴 생각을 못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런데 나는 부자도 아니었지만 내가 좋아서 어려운 형편에도 내 돈 써가면서 사진을 찍었어요. 누가 시키면 못하는데 그저 내 좋아서 취미생활로 그런 거지요. 한 가지 내 같은 사람이 찍은 사진은 잘 찍지는 못했지만 전문적인 사진사가 찍지 못한 그런 게 있거든요. 내만 찍는 사진, 그게 사진 찍는 재미가 아닐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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