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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생애사] “땅이 해코지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며” 와룡 농사꾼 구정회-2
2019/08/07 15:15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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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공동기획연재] 2019 안동·예천 근대기행(2)
-2부-

오원춘 사건 재판 과정을 지켜보다

오원춘 씨 사건 삼차 공판까지 나도 참석 했어요. 재판할 때 회원들이 많이 갔어요. 전국 임원들 거의 다 갔다고요. 만에 하나라도 오원춘 씨가 바른 말을 해서 거기서 뒤집어 지면은, 옳게 뒤집어 지면은 유인물 뿌리고 들고 일어나려고요. 그런데 영 뭐……. 인권 변호사가 둘인가 셋인가 여기서도 가고 1차 때는 두봉 주교님도 가시고. 인권 변호사가 겨우 얻어낸 게 딱 한 가지예요. 반대 심문하는데 오원춘 씨 검사 심문하는 데는 쉬러, 놀러 울릉도 갔다, 그런 식으로 자꾸 질문하고 그렇다 또 그렇다 하고 납치하고 정 상반된 걸로 계속 재판이 이끌려 가고 마지막으로 변호인 측 심문하는데 그 변호사가 오원춘 씨 어디 아픕니까? 왜 그래 힘이 없어요? 하니까 아유, 아픈 데가 많애요. 허리도 아프고 팔도 아프고 몸만 비틀만 아파요. 하더라고요. 왜 그렇게 아픈 데가 많겠어요? 약물로 당했는지, 얼마나 당했으면 얼굴이 하얀 게 본색이 아니더라고요. 그래 유도심문 조금 한 거 밖에 성과가 없고. 수녀님들하고 다들 전국에서 그만큼 기도회도 하고 시위를 했으니 바른 소리 한마디 할까 싶어 기대 했었는데 영 안 좋으니까 성직자들도 모였다 다 흩어지고요. 첨 재판할 때 하루 종일 하는데 창으로 바로는 볼 수가 없죠. 피고인석이 있고 재판관이 있고 방청석은 이쪽에 있으니까 오원춘 씨가 우리는 못 보지요. 대구 지법이 엄청 커요. 큰데도 거기 꽉 차고 첨에는 방청권 없이 아무나 다 들어갔어요. 오원춘 씨 얼굴이라도 보려고 창을 열어놨는데, 재판관 있고 피고인석 있고 그 사이에 창이 있어요. 창을 요래 열고 얼굴을 보니까 미안하다는 뜻인지 안다는 뜻인지 상종을 많이 했기 때문에 재판을 하다 말고 날 보고 눈인사를 하고 이러더라고요. 나는 눈짓으로 이래 하고. 그 다음 공판에 가니까 못 보도록 그 창을 탁 막았더라고요. 막고 방청권을 배부를 하는데 한 쉰 장 정도밖에 안주더라고. 성직자 몇 장, 내가 얻은 건 열 장 밖에 안 됐어요. 교구 김욱태 사무처장 신부님이 방청권을 배부 받아서 전국 농민회 회원들 쓰라고 주시더라고요. 전국에서 모여 있는데 누구는 주고 누구는 못 주고 할 수 없어서 내하고 같이 간 사람들도 못주고 나는 내 한 장만 가지고 전국 본부 회장한테 다 줘버렸지요. 그래 본부 회장이 아홉 장을 가지고 그 다음부턴 전략을 짰어요. 임원들이 멀리 전국에서 방청하러 오는데 법정 한번이라도 보고라도 가라고. 열 장을 가지고 처음에는 회원 열이 들어가잖아요. 그 다음에는 한 30분쯤 있다 그 증만 있으면 방청 하다가도 화장실도 가고 들락날락 할 수 있으니까 그 증을 가지고 다음 농민회원들한테 넘겨주는 거예요. 어떻게 재판하는지만 보고 20~30분 있다 넘기고. 재판을 하루 종일 해요. 점심시간 휴정해서 점심 먹고 와서 또 하고. 변호사라든가 성직자들은 점심을 우리하고 같이 먹었는데 물을 안자시더라고요. 화장실 안 가려고. 그렇게 해서 멀리서 온 사람들 다만 삼십분에서 한 시간씩 다 보게 했지요. 방청권 열 장 가지고. 그 다음 부터는 방청권을 주고는 팔에다 시퍼런 돼지비계에 급수 도장 찍듯이 찍었어요. 이 사람 외에는 방청 못하도록. 그런 와중에도 그해 약혼 상태여서 11월 5일로 결혼 날짜는 나있었어요. 그때 전두환이 들어서서 모든 청첩장, 부조를 절대 금지 시켰어요. 간소화, 절약 한다고요. 청첩장을 못 만드니 교구청 이양이 친척들한테 하고 알리라고 우편엽서에다가 타이핑을 해주더라고요. 결혼 축하해주러 연락을 받고 전국에서나 안동 관내 분회원들이 왔었어요. 그날이 마침 최병욱 회장 공판일과 겹쳤어요. 9월 15일 있었던 오원춘 사건 2차 공판에서 방청권이 없다고 못 들어가게 하니까 문을 두드렸다고 법정모욕혐의를 적용했어요. 회원들이 오전에 결혼식에 온 걸 정호경 본당 신부님인지, 류강하 신부님인지 여기는 좋은 자리고 거기는 응원이 필요한 자리니 그리로 가라고 보내시더라고요. 그래서 사진에는 회원들이 몇 안 찍혔어요. 10·26으로 유신이 막을 내리고 정호경 신부님이 풀려나고 긴급조치가 해지가 되고 나니까 정재돈 씨도 나오고 오원춘 형제도 12월 8일 석방됐지요.

017.jpg▲ 1979년 11월 5일 안동문화회관 대강당에서 결혼식을 했다. 농민회 활동을 같이 하던 사람들과 함께.
 

안동연합회 창립 후 서서히 농민회 활동에서 멀어지다

안동연합회가 생기기 전 협의회 차원에서 함창 본당에서 추수감사제를, 전국 감사절을 크게 했어요. 그런데 안동협의회에서 제일 중점적으로 한 것이 하나는 농민 의식화, 즉 쌀 생산비 조사였어요. 내가 농사지었는데 얼마나 소득이 있는가, 수지타산이 되는가 하는 생산비 조사 사업하고 또 하나는 농협 민주화 운동으로 강제 출자 반대, 출자는 왜 해야 되며 농협은 어떤 구조여야 하는가 하는 그 두 가지예요. 양대 사건(함평 고구마 사건, 오원춘 사건)이 다 관료적인 하수를 받은 농협이 관련 돼 있잖아요. 그때나 지금이나 농촌문제의 정신적인 문제의 뿌리거든요. 그런 이유로 쌀 생산비 조사 추수감사제를 연합회 창립되기 전에 했었어요. 안동연합회가 창립되고 임원 선출 과정이 앞서 이야기 한 대로 되고 그러니까 내 생각으론 약간 소외감도 있었지요. 또 거기다 신혼 때였는데 집사람하고 같이 대전에서 전국 추수감사제를 하고 오다가 내가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보은재 꼭대기에서 버스를 세우고 내려서 먹거리를 사러 버스하고 버스 사이를 가로질러 가게로 가다가 차에 받혀서 공중으로 붕 떴다고요. 다행히 타박상만 입었지만 그날은 거기서 못 오고 보은 성모병원에서 집사람하고 있다가 왔어요. 죽다 살았지요. 그때는 농민회 총무를 하려는 사람도 많았어요. 81~83년도 까지 우리 애 둘 낳을 때까지는 정말 열심히 활동 했지요. 73년도 제주도 군대 생활부터 76년 시작한 농민회 활동까지 십여 년 동안 담금질하고 운동질 한 거지요. 정호경 신부님이 풀려나와서 안동 농촌 복음화 활동을 외국에 알리고 외국의 원조를 얻어서 1981년에 용상동에 농민회관을 지었거든요. 그때까지 아직 한국에는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았어요. 오원춘 사건 해결이 잘돼서 두봉 주교님이 추방 될 뻔한 것도 교황청에서 추방 안하도록 정치를 하고 또 나폴레옹 훈장도 받으시고. 이제 이쯤이면 내가 아니라도 저절로 굴러 갈 것이다 하고 생각했어요. 또 내 주위에는 같이 활동할 뿌리가 없었어요. 여기서도 내까지 네 사람이 쌀 생산비 조사를 했어요. 함창 조사보고대회 할 때까지도 동행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런저런 일로 끝까지 같이 하진 못했어요. 극과 극은 상충하거든요. 그러면서 들어간 게 안동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원이에요. 송현동에 가면 군부대 쪽에 큰 건물이 있어요. 상지대 앞 율세동에 있던 것을 건평 700여 평에 5층 건물을 지어서 옮겨간 거예요. 거기 터 닦기 전부터 다 지을 때까지 관리하면서 여러 일을 했어요. 애들 셋을 데리고 집사람하고 거기 사택으로 들어가 버리니까 농민회 운동하고 자연스럽게 차단이 된 거죠. 내 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못가고 농사 지어가며 일을 하니 또 못가고. 일요일은 수녀님들 태워서 미사 보러 가야 되기 때문에 못가고. 수녀님들을 상지대학까지 출퇴근 시키는 미니버스 기사도 한 일이년 했어요. 그래도 명분 있는 시위나 모임에는 가서 멀리서 봤죠. 저 정도면 내가 없어도 되겠구나 하고. 안계 소몰이 행진이라든가 전두환 말년 노태우 들어설 때 안동 6월 항쟁 직선제 쟁취 시위라든가 그럴 때는 참여했어요. 수녀원에서 일 년 반 정도 있다가 나와서는 아이들 교육이며 농사일에 전념하면서 자연스럽게 농민회 활동과 멀어졌어요. 진짜 농민으로 돌아와서 농사일에만 전념하면서 여태 산거지요.

018.jpg▲ 1987년 1월 8일 송현동 그리스도의 교육 여자 수녀원 신축 당시 관리인으로 근무할 때.
 

농민회원 칠순잔치를 계기로 30년만에 다시 만난 가톨릭농민회 동지회

그러다가 2015년 7월 27일에 농민회원 ‘칠순잔치’에 참석하면서부터 활동을 다시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농민운동 시작했던 사람들 얼굴 하나라도 보려고 갔지요. 예천 풍양농촌선교성당에서 안동연합회 회원 중에 70살 이상 되는 사람 회갑 잔치를 했다고요. 혹 옛날에 같이 운동했던 사람 하나라도 볼 수 있을까 하고 집사람하고 갔어요. 삼십 몇 년이 지난 뒤에. 그 안에 소식은 잘 모르고 교회 소식지로만 들었지요. 대구경북연합회 창립회 때 온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요. 아는 사람도 없고. 그런데 안동연합회에 처음 농민교육 받을 때 사진이 한 장 있더라고요. 내가 들어있는 사진이. 그 교육 받을 때 옷이 함평 고구마 사건 때 입었던 그 재건복이래요. 정재돈 씨, 이길재 씨도 나오고 정호경 신부님도 나오고 하는 그 사진을 걸어놨더라고요. 얼마나 반갑던지. 칠순잔치 있고 얼마 안 있어 백남기 농민 물대포 사건이 터졌어요. 왜 그 많은 노동자 시위 중에 하필이면 가톨릭농민회냐고요. 가톨릭농민회는 권익운동도 하고 시위를 세게도 안한다고 이제는. 생명공동체하고 우리 먹거리하고 친환경 농사의 근본적인 문제 이거만 하지. 전에처럼 안하는데 왜 하필 백남기 형제가 죽느냐 말이라. 농민회원이 혼수상태에 있다는 그 소식을 접하고 안타까워하고 있는데 처음 농민회를 창설했던 동지들이 전부 다 모이는 동지회에서 그때 당시 임원들한테 SNS로 연락이 왔어요. 전국 동지회 회장은 이길재 씬데 전·현직 농민회원들을 모아서 긴급 동지회를 연거죠. 서울 의과대학 병원 옆에 도산 안창호 흥사단 회관에서 한다고 해서 안동 동지회 회장 배용진 씨, 진상국 씨, 사무실에 강성중 씨하고 실무자 하고 대여섯이 올라갔어요. 가니까 전국 교구에서도 안동 교구가 인원이 젤 많더라고요. 그만큼 농민들이 겁을 먹어가지고. 초창기에 전국에서 봤던 얼굴들 삼십 몇 년 만에 첨 본거지요. 어떻게 하면 이 일을 풀어나갈 것인가 하는 회의를 오후 5시에 시작해서 밤 깊도록 했어요. 서울대 병원 앞에서 미사도 드리고요. 병원 마당 앞에서 상태만 듣고 병실은 못가보고 한 40~50명 모였죠. 가서 보니 겁먹을 것도 아니다 싶어 그 담에 또 각 분회에서 빈소를 지키고 성금도 하고. 안동에서도 백남기를 살려내라 하고 여러 번 시위를 했잖아요. 그러고는 오늘날까지 새로 들락날락거리면서 촛불 들러 가고. 그러니 그때 동지회를 안 하고 전국의 동지들을 안 불러 모았으면 처음에 난 그날만 가고 안 갈라 그랬어요. 그런데 두 번, 세 번 가게 되더라고요. 그 뒤로 한 번도 안 빠지고 교류를 하고. 한겨울에 박근혜 하야 촛불 집회를 안동 조흥(신한)은행 앞에서 했잖아요. 촌에서 한 번도 안 빠지고 차타고 혼자 갔잖아요. 누군지 모르도록 얼굴 안 나타내려고 혼자 갔어요. 간간히 SNS에는 다녀온 사진 올리고. 첨 집회 할 때 가수들이 한영애가 부른 조율을 불렀다고요. 그걸 동영상을 찍어서 SNS에 올리고 시위 하는 것도 올리고. 이듬해 박근혜가 끝날 때까지. 박근혜가 구속되고 난 뒤에 2차 동지회를 안성 미리내 성지 옆에 있는 전국 농업협동조합 임원 연수원에서 했어요. SNS 시작한 계기도 백남기 사건 때 동지회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첫 번으로 올리면서 부터예요. 첫 동지회 때는 궁금하던 이병철 씨는 올 줄 알았는데 안 왔더라고요. 오원춘 사건 때 워낙 열성적으로 했고 6월 항쟁을 전국적으로 진두지휘 한 사람이거든요. 시집을 4집인가까지 냈어요. 전국 동지회 회장 이길재 씨도 그렇고 이제는 여든 훌쩍 넘은 분들이 많아요. 동지회 모임에 지금까지 세 번 참석하면서 옛 동지들과 다시 교류하고 있어요.

019.jpg▲ 백남기 농민 물대포 사건을 계기로 2015년 12월 8일 서울 흥사단 회관에서 있었던 첫 전국 가농 동지회에 참석. 왼쪽 두 번째부터 최병욱, 서경원, 이길재, 임봉재. 구정회 씨가 찍어서 SNS에 처음 올린 사진이다.
 
020.jpg▲ 생명공학(가축 유전자)을 연구하고 있는 막내 자을 씨가 몇 년 전 귀촌해 함께 살고 있다.
 

땅이 해코지 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며

함평 고구마 사건 당시 농민들은 이런 구호를 외쳤다.

'‘농민의 피와 땀이 범벅된 고구마가 노변에서 눈비를 맞고 굴러 밟히는 것은 곧 농민이 짓밟히는 것과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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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현장에서 찍힌 사진 한 장을 사십여 년 만에 인터넷 검색을 통해 발견하고 SNS에 올렸던 게 계기가 되어 구정회 씨의 초기 가톨릭농민회 활동이 지인들에게 알려졌다. 진땅을 다지며 밟고 지나간 숱한 발자국의 흔적처럼 지워졌을지도 모를 그의 인생 이력들을 다시 끄집어낼 수 있었다. 구정회 씨는 시간이 오래 되어 본인의 구술이 다소 혼돈이 있을 수도 있음을 염려해서 몇 차례에 걸쳐 기억을 더듬고 자료들을 살폈다. 그러나 “땅을 재산으로 봐서 다툼을 하거나, 무시하거나, 해롭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 땅이 해코지 한다”’던 정호경 신부님의 생전 말씀 하나는 선명하게 가슴에 새기고 살아왔다. 역사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의 몰락 이전에는 분노한 농민들의 봉기가 있어왔음을 그는 강조했다. 땅은 농민이며 농민은 곧 땅이므로 땅이 해코지 당하지도, 해코지 하지도 않는 세상을 그는 여전히 꿈꾼다. (글/ 신준영 5longgol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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