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0.08.14 09:24 |
[우리 마을 이야기] 목성동 연가
2019/12/09 14:11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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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공동기획연재] 2019 안동·예천 근대기행 (10)
목성교가 있던 목성동
개천에서 잡은 메기
목성동의 오래된 가게 천리사, 동양방송설비, 화산인쇄사

2019년 안동예천 근대기행은 생생한 르포취재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다룬 <구술생애사>와 안동과 예천 두 지역의 역사와 문화, 생활사의 근간이 되는 ‘마을’을 테마로 한 <우리 마을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마지막 <우리 마을 이야기>는 목성교가 있던 안동시 목성동 이야기를 펼쳐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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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려다본 목성동 ⓒ구자을


목성교가 있던 목성동

사라진 지명을 부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사라진 지명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그 장소가 갖는 의미는 또 무엇일까. 하이마, 나이야가라식당, 진모래, 농고 사거리, 36사단, 마뜰비행장, 제일은행 사거리, 태화 삼거리 그리고 목성교.

지금은 사라진 목성교지만 안동사람들은 여전히 목성교를 습관처럼 얘기한다. 목성교 사거리에 ‘푸쉬쉭’하고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정차하던 2번, 11번 시내버스, 가을이면 안동시산림조합 골목에서 열리던 송이시장, 돈까스로 유명했던 코끼리분식 그리고 내 인생에 커다란 아랫목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사무실이 있던 권방사선과 건물 4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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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시 목성동 지도. 2019년 12월 5일 카카오맵


목성교 사거리는 동쪽으로 보건소, 서쪽으로 안동교회를 잇는 서동문로, 동북쪽 시청과 서남쪽 천리동을 비스듬히 연결하는 퇴계로가 지나는 곳이다. 목성교 사거리에서 목성동성당까지를 직선으로 이어 그곳을 꼭짓점으로 한다면 삼각형 모양을 이루는 동네가 목성동에 해당한다. 하지만 ‘목성교’의 상징성은 그 이상이어서 일대의 서부동과 화성동, 천리동까지 언급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안막동에서 흘러내려 안동시청 앞을 지나 낙동강으로 흐르던 천리천은 목성동을 도심 속 낭만의 공간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사장뚝에 즐비하던 포장마차촌에서 시인묵객들은 천리천을 ‘세느강’이라 명명하고 실제로 세느강, 행운집 등의 실내포차가 즐비한 거리엔 술 취한 청춘들이 자주 목도되곤 했으니까. 1989년 도시개발사업으로 천리천 복개공사가 시작되면서 목성교와 천리천, 사장뚝이라 불린 천리천 제방 등은 모습을 달리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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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9년 여름, 목성동에서 ⓒ조창희


조창희 목사가 기억하는 목성동

전 의성감리교회 조창희 목사는 지금으로 치면 천리사 맞은편 영창피아노(현재는 화장품도매창고) 앞이 생가다. 사진은 남동생(조덕희, 1957년생)이 집 앞에서 목마를 타고 놀고 있는 모습이다. 옆에는 주철로 만든 우체통이 있고 맞은편엔 기와집이 있다.

조창희 목사에 의하면 6.25전쟁 때 안동에서는 포탄이 떨어진 곳이 3~4군데 정도였다고 한다. 그중 안동기차역과 지금의 안동시청에 각각 포탄이 떨어졌다. 나머지는 공중에서 기름을 살포했는지 화마로 뒤덮여 시내의 70% 이상이 잿더미로 소실된 것이라 한다. 포탄이 떨어진 기차역 웅덩이에서 아이들은 메기를 잡기도 했다고.

지금의 경북유교문화회관은 옛날의 화산학원이 있던 터다. 이곳은 지역에서도 역사적 상징성이 있는 중요한 장소이다. 화산학원은 안동지역에서 처음으로 신학문을 가르쳤던 교육기관으로 일제강점기에 세워졌다. 이후 안동교육청이 들어섰고 후에 그 터에 경북상호신용금고가 새로 지어진 후 권택근 성형외과가 들어섰다가 지금은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경북유교문화회관으로 바뀌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안동을 거쳐 북진해 올라갈 때에는 경북유교문화회관 건물에 미군사령부와 국군부대가 임시 사령부 거처로 삼아 이용을 했다고 한다.

“안동중앙국민학교(안동초등학교)는 허허벌판이니까 포탄 투하 시 그대로 날아가 버리거든요?

산 밑에 있으면 포탄을 쏟아 부어도 명중시키기 힘드니까 위치적으로도 아마 임시사령부로 제격이었지 싶어요.”

북쪽으로는 천주교성당이 울타리 쳤고 뒤로 언덕 산이 막아주는 형국이라 군사학적으로 유교회관 건물은 안전한 요새와 같았다. 그런데 사령부로는 삼긴 삼았는데 정작 마실 물이 없었다고 한다. 학교 건물임에도 펌프가 없어 물이 안 나와 애를 먹던 중 근처 조창희 목사의 집에서 물을 길러다 썼다.

“우리 집에는 뿜뿌가 나와서 한국군 특무상사가 졸병들을 인솔해서 바게쓰에 쌀을 담아 와서 우리 집 마당에서 쌀을 씻어 가곤 했어요. 그렇게 부대에서 밥을 지어먹고 하니 군인아저씨들이 공짜로 물 받아먹는 게 미안했는지 쌀을 바가지로 퍼다 줘서 우리가 그때 다행히 쌀 걱정은 안하고 밥을 해먹었다는 거 아닙니까.”

한번은 부대 안으로 들어가 본 적도 있었다.

“미군들이 나를 귀엽게 봤는지 달랑 안고 부대 안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온 식구가 걱정을 했어요. 씨레이션(전시에 먹는 식량) 박스, 식빵, 초콜렛, 껌 등을 안겨줘서 내보내는 바람에 부대 구경도 잘했고 온 집안 식구들이 덕분에 잘 먹었죠. 부대 안에서 나대로 이런 것 저런 것 구경을 해보니 신기했죠. 아마도 필요할 때는 땅굴을 파기도 한 모양인데 그런 흔적도 있었어요.”

화산학원이 화산국민학교로 다시 사범학교 부속 화산국민학교로 통폐합 후 폐지가 되면서 학생들은 흩어지게 된다.

“안동사범고등학교를 폐지하고 교육초급대학으로 승격시켰거든요. 내 생각에는요, 화산학교가 부설 초등학교여서 사범고등학교가 폐지되니까 안동사범학교 병설중학교도 함께 폐지되고 연쇄적으로 다 폐지가 됐지 싶어요.”

학교가 폐지되면서 동쪽에 있는 학생들은 동부초등학교로, 서쪽에 살고 있는 학생들은 안동초등학교로 분산·편입시켰다. 목성동에 살았던 조창희 목사는, 입학은 화산국민학교에서 하고 2학년 가을학기에 안동초등학교로 편입했다. 한 학년이 60명씩 두 반이었던 규모에서 한 클라스 당 60명씩 6~7반씩, 전교생이 2천명을 훌쩍 넘긴 규모로 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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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목성교에서 ⓒ조창희



개천에서 잡은 메기

목성교 다리는 그다지 크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복개 전 여름 장마철에는 이 집 저 집 분뇨를 퍼서 장마로 흘러가는 황톳물에 퍼부어 버리곤 했다고. 장마가 멎어 물살이 약해지면 그 다음부터는 초등학생 애들부터 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밴드(그물망)를 가지고 풀숲에 놓고 발로 꾹꾹 눌러가면서 메기며 장어 등 저녁 반찬거리를 마련했다.

“목성교 다리는 완전한 다리로 건재했었고 지금 시청 앞에는 다리가 없다보니까 전봇대 같은 통나무를 두세 개 엮어서 외나무다리를 임시방편으로 만들어 사용했지요. 명륜동 쪽에도 안막동 가는 길 쪽에 목성교처럼 옳은 다리가 있었어요.”

도로 포장도 안 되었던 그 시절 목성교 동쪽 서부동과 삼산동에는 전봇대가 세워져서 전기가 들어왔지만 반대편 안동교회 가는 쪽은 전기가 안 들어왔다.

“우리 집도 전기가 안 들어와서 남포등, 석유 등잔을 키고 살았어요. 당시에 전봇대만 세우면 전기를 가설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 목성교에서 우리 집 있던 피아노대리점까지 기껏해야 7~80m 되나? 전봇대를 세우자고 하니 사람들이 우리는 지금까지 전기 없이 남포등으로 잘 살았다고 필요 없다고 해요. 그러니 어째요 방법이 있나, 우리 집 혼자 전봇대 2~3개 세우는 값을 다 물어서 전기를 넣었지요. 그런데 전봇대를 세우니 막상 전기는 또 다 땡겨 쓰더라구요.”

옆에는 금은방과 국화빵집, 그 옆에는 호떡집, 또 그 옆에는 제재소가 있었다. 제재소는 개천까지 넓게 톱날이 돌면서 규모가 컸던 모양이다. 이후 군장마크, 학교 명찰, 체육용품을 판매했던 천리사가 들어서고 옆에 미장원, 2층에 사진관, 또 그 옆에 시계점포, 이발관, 쌀가게, 솜 트는 집, 그 다음이 삼일약방(지금의 목성교 바로 가기 전), 철물점, 인쇄소 마지막에 목성교가 있었다 한다. 그리고 너머에 안동문화사와 보건소 맞은편 경북인쇄소 등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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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성동 성당 ⓒ백소애



목성동성당과 종교타운

목성동성당은 안동의 랜드마크 중 하나다. 이제 목성동성당 일대를 종교타운이라 부른다. 성당 입구 바로 옆으로는 목성공원을 조성해놓았다.

안동 종교타운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개신교, 유교, 원불교, 민간신앙 등을 하나로 아울러 소통과 화합, 봉사를 구현하기 위해 조성되었다고 한다. 동쪽에서부터 유·불·선을 합친 신흥종교 성덕도 안동교화원, 1927년 설립된 천주교 안동교구 목성동주교좌성당, 1770년에 건립된 안동김씨 종회소,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고운사 안동포교당 대원사, 경상북도유교문화회관, 1909년 설립된 개신교 안동교회 등의 시설이 밀집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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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목성동성당. 각종 시국사건 관련 시위가 열리기도 했다. ⓒ천주교 안동교구청



안상학 시인은 2018년 겨울에 발간된 <기록창고> 1호(경북기록문화연구원 발간)에 실린 ‘안동민주화운동의 성지, 목성동성당’이라는 글을 통해 “옛 천주교 안동교구 목성동주교좌성당(경북 안동시 목성동 산1번지, 이하 목성동성당)은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안동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로서 한 시대를 누렸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붉은 벽돌과 높은 첨탑이 인상적인 고딕양식에 가까운 건축물이었다. 풍수지리로 살펴보면 잠두혈 자리다. 명당 중에 명당이다. 안동시가지가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목성산 이마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안동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는 자리라면 어디서라도 높은 산 위에 올라앉은 성당 건물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외부 사람들이 안동을 둘러보고 이미지를 새긴다면 몇 손가락 안에 들기에 모자람이 없는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고 얘기했다. 또 “신자들에게는 참으로 신성한 공간이지만 일반 시민들에게는 훌륭한 공원이나 다름없었다. 가난한 연인들에게는 더없이 아늑한 데이트 장소였다. 안동시민들에게는 소중한 추억이 서려있는 정서적 공간”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는 한편 목성동성당은 민주화 운동의 성지이자 각종 시국사건이 있을 때마다 저항과 투쟁이 있었던 역사적인 공간이었다. 농민도, 학생도, 사제도, 수녀도, 시민도 함께 나섰다. 그러한 상징적인 공간이었던 목성동성당은 2004년 지금의 건물로 새롭게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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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도니스 레스토랑 광고 ⓒ백소애



안동교회의 로뎀나무, 목성동성당의 에스포와처럼 대원사에도 커피숍이 들어섰다. 이름은 ‘무심코無心co’다. 지금의 대원사가 지어지기 전 1980년대 반변천 문학회 문청들이 대원사 지하예향다방에서 시낭송회를 갖는 등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곤 했다. 그전에는 심지다방이었다고 한다. 후에 예향다방이 사라지고 아도니스라는 레스토랑이 생겼다. 그곳에서도 안개 시낭송회 등이 열렸다. 문청들의 문화공간으로 사랑받던 그곳은 1990년대 들어서며 없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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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성동의 터줏대감 천리사 ⓒ백소애



천리만큼 길고 오래 가라, 천리사

목성동에서 가장 오래된 가게는 단연 천리사다. 스포츠용품 전문점 천리사는 1958년 문을 열었다. 당시 28세의 창업주 홍영표 씨가 운동구점을 하고 있던 숙부의 도움으로 시작한 가게로 상호도 숙부가 ‘천리만큼 길고 오래가라’고 지어준 것이다. 그 덕일까 지금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천리천이 흐르고 있어 천리사라 불렀을 거라 유추한 생각과는 달랐다.

“안동사범학교 1회 졸업생이셨는데 교직으로 안가고 장사를 시작하셨어요. 처음엔 천리체육당이라고도 했답니다.”

30년 전 가게를 물려받은 2대 사장 홍웅기(63) 씨의 말이다. 홍웅기 사장은 창업주의 재종손자 된다. 은퇴 후 천리사 2층 건물에 거주했던 홍영표 사장은 89세의 일기로 작년에 작고했다.

천리사는 처음부터 지금 자리 있었던 건 아니다. 서부동에서 문을 열었다가 지금의 목성동 자리로 옮긴 것이 1967년쯤이고 10년 후 지금의 2층 건물로 지었다 한다. 홍웅기 사장이 맡아서 시작할 때는 바로 옆에 있던 사진현상소 백광사를 터 가게를 넓혔다.

“주소가 목성동 62번지입니다. 그래서 전화번호도 6200번이에요. 처음엔 국번 없는 62번이었다가 620번, 그러다 6200번이 되었지요.”

한창 호시절에 시작한 가게였으나 요즘은 조용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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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리사 홍웅기 사장 ⓒ백소애



“요즘 애들은 운동, 특히 야외운동을 안하니까 예전 같지 않죠. 학교에 체육용품을 납품한다거나 행사할 때 단체로 체육복을 주문하거나 해요. 가게 소매를 한다거나 그런 건 거의 없다고 봐야죠. 우리뿐만 아니고 대부분 소매가 잘 안되고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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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대째 이어오는 동양방송설비 ⓒ백소애



2대째 이어오는 동양방송설비

서른 둘 성덕기 씨는 1973년 서부동 안동문화사 옆에서 ‘동양소리사’를 열었다. 고향 진주에 살다가 금성사에 취직하게 되면서 대구에 발령을 받게 된다. 이후 금성사를 퇴직하면서 안동에 자리 잡아 창업을 하게 된다. 47년 전 안동에 왔을 때는 집이 낙후됐고 기와집이 많았다. 지금의 목성동으로 옮긴 게 1978년이다. 처음에 상호는 ‘동양티브이’였다.

“금성사 나와서는 바로 티브이로 이름을 졌어요. 근데 당시 한글순화운동을 한다고 해가지고 이름을 소리사로 바꿨지. 근데 자(아들)가 맡으면서 소리사는 챙피하다꼬 다시 바꿨지요.”

정보통신 자격증을 딴 아들 성동철(47세) 씨가 대를 이어 가게를 이어가고 있다. 올해 79세가 되는 성덕기 사장은 일선에서 물러나 아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다.

정보통신 공사업체이고 학교방송장비를 주로 취급한다. 초창기에는 TV, 전자제품, 부품 수리 등에 1988년 안동유선방송이 생길 때는 가장 호황을 누렸다.

“유선방송 시조랬지. 호시절이랬어요. 전두환 시절이었는데 그때 젊은 사람들은 전혀 모르지. 장사가 잘됐어요. 국내 수요가 폭발해서 그 당시 티브이가 대구 밑에 수성교에 있다가 팔공산 올라가면서 경북지역에 급진적으로 수요가 늘어났거든. 난리 났었지. 당시엔 동네에 티비 한 대 사면 동네 애들 친척들 바글바글해서 티비 사는 걸 싫어했어요. 요새는 꺼뜩하면 살 수 있으이 쉽잖아요. 지금은 현상유지나 겨우 해요.”

아무 연고도 없는 안동에 자리 잡아 1남 2녀 낳고 지금의 집을 장만했다. 가게와 붙어있는 집을 장만했을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 못한다. 막둥이 장남 아들이 대를 이어가니 마음도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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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대 성덕기 사장 ⓒ백소애


“안동 와서 이 집을 샀을 때가 제일 기뻤어요. 가정집이 여기 붙어 있어요. 셋집을 댕기다 보니까 다른 사람 보기에는 별거 없어 보여도 내한테는 이만한 궁전이 없어요. 처음에사 회사서 대구 파견 나온 인연으로 여 안동에 주저앉았지, 뭐. 큰 변화 없이 안동시민들 덕분에 잘 살았고 처음엔 운이 좋아서 장사도 곧잘 됐어요. 유선방송을 안동 가구 수의 80%를 우리가 가입시켰어요. 나중엔 못하게 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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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년 가게 앞에서 ⓒ성덕기


목성동 길가를 지나가도 아는 사람만 알지 일반 사람들은 잘 모르는 업종이라고 한다. 특수 기능이라 필요한 사람만 오는 곳이지 일반 소매업을 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부심도 대단한데 안동에서 자격증 갖고 일하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라 한다. 성동철 2대 사장이 전기통신 자격증을 가진 덕이다.

“아들놈이 어려서부터 컴퓨터를 되게 만졌어요. 프로그램을 했는데 요새 젊은이들은 모르겠지만 오디오 신호를 풀어서 게임을 했어요. 그런 쪽으로 재주가 좀 있었어요. 아무도 안 가르쳐줬는데… 공부를 몬하니까 그런 쪽으로 트였겠죠? 하하. 아들놈이 일은 곧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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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소리사 시절. 오른쪽이 2대 사장 성동철 씨의 6살 무렵. 어려서부터 덩치가 컸다고 한다. ⓒ성덕기



번화가인 목성동도 예전만 못한 느낌이다. 일단 가게 앞을 오가는 사람이 확연히 줄었다.

“우리가 여 이사 올 때 요 사거리 다리 밑으로는 다 하천이랬어요. 비 오면 붕어가 올라왔지요. 요 밑에는 신시장 넘어가는 다리가 있었고. 복개되고 포장되면서 목성교가 없어졌지. 복개된 지 한 30년 안됐겠습니까.”

유선방송 하다 뺏기고 대리점 하다가 뺏기고 잘될라치면 손안에서 빠져나갔다. 지금은 방송장비 쪽으로 주력하고 있다. 국번도 없는 전화번호 시절부터 같은 번호를 부여받아 지금까지 쭉 쓰고 있다.

“0303. 요 전화번호 딸라꼬 정말 애 먹었어요. 추첨을 했는데 한 5~60대 1이었나, 그 정도로 경쟁이 심했지요. 흑색전화 백색전화 하던 시절 시청홀에서 공식적인 추첨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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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안동댐에서 열린 불교 행사에서 ⓒ성덕기



사진 한 장 찍자는 말에 서로 찍으라고 미루던 부자(父子)는 출장 나가버린 아드님의 승리로 끝나버렸다.

“뭐 이런 얼굴 찍어 뭐할라니껴.”

목성동 거리를, 목성동 동네를 한결같이 47년 지켜온 ‘이런 얼굴’이다.



화산학교를 기억하는 화산인쇄사

인근의 경북인쇄사, 목성인쇄사처럼 인쇄사 말고도 시청 부근에는 많은 인쇄사가 있다. 그중 화산인쇄사는 목성동에 자리 잡아 상호만으로도 이곳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옛날 화산학원이 있었던 때를 보지는 못했지만 교육청도 있었고 남다른 장소잖니껴. 그래서 화산이라 이름 졌지요. 인제는 연세 많은 분 아니면 화산을 잘 몰래요.”

와룡이 고향인 지창호(65세) 사장의 말이다. 1980년 10월에 경북유교문화회관 맞은편 자리에 6~7년 있다가 지금의 목성동성당 입구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그때는 명함 가격이 2천원, 2천 5백 원 하던 시절이었다. 초창기엔 관공서 서식, 학교 문집, 청첩장 등을 주로 만들었는데 청타(한문타자)를 주로 사용했다.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에는 활자 자판을 사용하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 컴퓨터가 있는 세상엔 모든 게 빠르고 편해졌지만 일은 그만큼 줄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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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성동성당 입구 건너에 있는 화산인쇄사 ⓒ백소애



“요새도 서식 좀 하고 스티커, 명함, 팸플릿 뭐 그렇게 하죠.”

지창호 사장의 기억 속 목성교는 길이가 5m 정도나 됐을까 폭도 그렇게 넓지 않은 2차선 교량이었다.

“요 목성교 삼각지대에 방공호가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민방위 훈련하던.”

연말에 많이 바쁜 시기지만 요즘엔 예전만 같지 않고 별다른 일이 없을 때면 고향 와룡에서 쉬엄쉬엄 농사를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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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산인쇄사 지창호 사장 ⓒ백소애



“평생, 거진 인쇄 일을 했다고 봐야지요.”

함께 나이 먹어가는 마스터기와 제판기 앞에서 너털웃음을 짓는 그다.



그리고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은 주로 이렇게 불린다. 사랑방, <안동>지, 사랑방 안동.

‘안동사람의 삶과 생각을 담는 책’이라는 캐치플레이즈로 46배판 40쪽 분량의 계간 무가지로 내다가 80쪽 분량의 격월간지로 발행하게 되었다. 책 이름은 ‘향토문화의사랑방 안동’, 책을 내는 곳은 ‘문화모임 사랑방’이었다가 ‘문화모임 안동’으로 개명을 하게 되었다. 1988년 창간하여 2014년 11,12월 종간호를 내며 문을 닫았으나 2015년 5,6월부터 책을 내는 곳이 ‘문화모임 안동’이 아닌 ‘도서출판 한빛’으로 바뀌면서 복간호를 내게 되었다. 당시 함께 했던 편집위원, 운영위원들은 새로운 운영진으로 모두 바뀌었다.

목성교사거리에 있던 권방사선과 4층 사무실에서 올려다보면 우뚝 보였던 목성동성당과 내려다본 삼각지에 서 있던 광고탑. 광고탑에는 주로 시민체전, 민속축제, 탈춤축제를 알리는 광고가 붙었고 복잡한 교통 흐름에 불법 주정차 단속 호루라기 소리는 4층까지 들리곤 했다.

내비게이션이 일상화되지 않던 시절에도 안동사람에겐 ‘목성교사거리 권방사선과 건물’이라고 하면 척하면 착 알아들었다. 간혹 타지에서 오는 사람들은 길을 몰라 헤매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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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성교 ⓒ백소애



사랑방 시절 ‘그의 원고가 도착하면 인쇄소에 넘겨도 된다’는 전설을 남겼던 안상학 시인의 시로 ‘목성동 연가’를 마무리한다. 이 시는 2014년 겨울 종간을 앞두고 그해 봄, 그에게 종간의 소회를 청탁한 시다. 청탁받은 사실을 까맣게 잊은 그가 전화로 다시 물어왔을 때는 마감일까지 채 일주일도 남지 않았을 때였다. 그러고 3일 후 그는 이 시를 보내왔는데,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예상보다 너무 빨리 보내줘서 놀랐고 그 짧은 시간에 이토록 서정적인 시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시를 읽고 나는 잠시 먹먹해졌던 거 같다. 그건 종간 때까지 함께 한 편집장 김복영 방장님도 마찬가지였는데 좀체 칭찬에 인색한 분이 “좋다”고 하셨으니 그걸로 족했다.

2번 버스를 타고 내렸던 ‘목성동 연가’도 그렇게 끝이 났고 이제 새주소 이름 ‘퇴계로’가 자리한 동네가 되었다. 그러나 콘크리트 아래 어딘가에는 지금도 천리천, 세느강이 홀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글/ 백소애 sodoor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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